영화 데니쉬 걸(The Danish Girl)은 세계 최초로 성별정정 수술을 받은 덴마크 화가 릴리 엘베와 그녀의 아내 게르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2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 곁을 지킨 사랑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 작품은, 화려한 미장센과 섬세한 연기가 어우러져 깊은 여운을 남긴다.
데니쉬 걸 줄거리
1920년대 덴마크, 코펜하겐의 작은 화실에서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와 아내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나란히 붓을 들고 각자의 그림에 몰두한다. 둘은 예술가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반자다. 그러던 어느 날, 게르다가 그리기로 한 모델이 늦자, 장난 반 부탁 반으로 에이나르에게 여성복과 스타킹을 입혀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한다.
그 순간, 에이나르는 거울 속에서 전혀 다른 ‘나’를 마주한다. 당황과 호기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이 뒤섞인 표정. 처음에는 단순히 한 번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줄 알았지만, 그날 이후 ‘릴리’라는 또 다른 자아가 점점 더 강하게 표면으로 올라온다.
릴리로서의 시간이 늘어갈수록, 에이나르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런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은 엄청난 용기이자 위험이었다. 게르다는 남편의 변화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지만, 곧 릴리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곁을 지킨다.
두 사람은 릴리가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한다. 파리의 화려한 거리, 독일의 병원, 그리고 조용한 화실에서의 대화까지, 릴리는 조금씩 ‘에이나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릴리’로 살아갈 준비를 한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성별정정 수술을 결심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릴리의 표정은, 그 모든 여정을 함축하고 있다.
영화의 볼거리와 매력
이 영화의 첫 번째 매력은 1920년대 유럽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세트와 의상이다. 코펜하겐의 차분한 항구 풍경, 파리의 거리와 무도회장, 화실 안에 걸린 초상화들이 하나의 유화처럼 스크린을 채운다. 특히 릴리의 옷차림은 캐릭터의 심리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처음엔 단정하고 조심스러운 드레스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화려하고 대담한 색감과 디자인으로 변하며, 그녀의 내면이 해방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촬영 기법 역시 감정선을 세밀하게 잡아낸다. 릴리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목선을 쓰다듬는 장면은 긴 대사 없이도 ‘진짜 나’를 확인하는 벅찬 감정을 전한다. 게르다가 릴리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 그들의 시선은 단순한 모델과 화가의 관계를 넘어,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동반자의 교감을 담고 있다.
음악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피아노와 현악 선율이 주를 이루는데,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부드럽게 따라간다. 릴리가 혼자 거리를 걷는 장면에서는 조심스러운 선율이 흐르고, 두 사람이 포옹하는 장면에서는 따뜻하고 넓은 화음이 번져나간다. 이 음악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감정의 파도를 한층 깊게 만든다.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
에디 레드메인은 릴리 엘베를 그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싸운 한 사람으로 그려낸다. 어깨를 낮추고, 발끝을 모으며 걷는 모습, 대화를 할 때 살짝 고개를 기울이는 습관, 웃음과 눈물이 한꺼번에 스치는 표정. 이런 디테일은 릴리의 여정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든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게르다라는 캐릭터에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상실감과, 그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켜주는 헌신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그녀가 릴리를 바라볼 때의 눈빛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모두 담고 있다.
두 배우의 호흡은 이 영화의 감정선을 이끄는 핵심이다. 초반에는 다정한 부부로서의 친밀함이, 중반 이후에는 서로를 지켜주는 동반자로서의 신뢰와 애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관계의 변화가 너무도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관객은 어느 순간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데니쉬 걸은 단순한 전기 영화도, 단순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길에 함께한 사랑의 이야기다. 릴리와 게르다는 서로를 잃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완성시켰다. 아름다운 영상과 섬세한 연기는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남기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우리가 ‘진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길 위에 사랑이 있다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를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말해준다.